시미나가 미처 문을 다 닫기도 전에 욕설과 함께 그들의 사연이 들려왔다. 아무리 제 성질 다 부리고 살던 나프니아도 평소에는 관리자들 눈치를 보는 척이라도 하느라 적당히 조절을 해가며 사람들에게 함부로 굴고는 했는데 이번 사태로 고삐가 풀렸는지 뇌를 거치지 않는 막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 아이 XX, 술에 취하면 다 XX 성희롱 XX…. 변명…. “
" 이야! 살벌하네~ " 언제 왔는지 반대편 끄트머리에 앉아있던 훌팩이 웅성거리고 모여있던 직원들 사이에서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 뭐래? 나올 때 뭐라도 좀 들었어? 훌팩이 회의실을 눈짓하며 묻자, 회의실 주변에 모여있던, 호기심에 가득 차서 반짝거리는 부담스러운 눈빛들이 일제히 시미나에게 집중되었다.
" 전 무슨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금방 나왔는데요 " 시미나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실망한 눈들이 각자의 추측이 섞인 이야기를 쏟아냈다.
" 그냥 썸은 아니었던 것 같지 않아? 미리드씨 눈 뒤집혀서 제대로 욕하던데!"
" 나프니아씨가 미리드씨 제대로 긁던데? 둘이 진짜 뭐 있었는데 미리드씨가 뺏은 건가? “
” 무슨 애도 아니고 손 좀 잡고, 뽀뽀 좀 했다고 이 난리가 난 거야? “
" 아니야, 내가 듣기로는…." 수많은 추측과, 관심의 탈을 쓴 새로운 소문들을 만들어 내는 곳을 뒤로하고 시미나가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훌팩이 따라붙으며 재차 물었다.
" 진짜 아무것도 못 들었어? 한창 재미있을 때 팀장이 데리고 갔는데…." 훌팩의 충족되지 않은, 호기심에 괴로운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렸다.
” 이놈의 관리자들은 필요할 때는 엄청 느리더니 이렇게 재미난 일이 있을 때만 반응이 빨라요! “ 훌팩은 투덜거리면서도 시미나가 없을 때 일어난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기 시작했다.
” 훌팩씨 이렇게 재미있어하면서 결과 안 보고 가는 거예요? 시미나의 의아한 물음에 금세 기력을 회복한 훌팩이 대답했다.
“ 중요한 건 다 들었지. 그리고 무슨 결과가 나오겠어? 외 은하 노동 관리법 때문에 자를 수도 없는데. 기껏해야 경고하고 끝내겠지. 그러니까 관리자들이 화를 내도 안 듣는 거잖아. 결과는 됐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거 같다니까~. 내가 전에 이야기했었나? 나 취미로 글 쓴다고? ”
“ 아니요, 처음 듣는데 무슨 글이요? ”
” ‘공허 속의 삶’이라는 책 들어봤어? “
” 태양계 초기 우주전쟁 시기 배경 우주선 조종사들 이야기였던 그거요? 드라마로도 나왔잖아요? 엄청 유명한 책인데 저도 읽어봤죠. 작가가 NGC 4161 은하단 역사 전문가라 고증이 엄청나다고 하던데, 전 그건 잘 모르겠고 인물 캐릭터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너무 재미있어서 어릴 때 엄청나게 좋아했었는데. “
” 정말이야? 사실 그거 내가 박사과정 논문심사 1차 탈락하고 충격받고 스트레스 해소하려고 쓴 거야 “ 훌팩은 시미나의 칭찬에 매우 기뻐하며 자신의 개인사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 그렇구나, 어쩐지. 훌팩씨 공부 많이 한 사람처럼 보였는데 내 짐작이 맞았네요. 근데 박사과정이라면 내 생각보다 나이가 있나 보네요. 그렇게 안 보여서 몰랐는데. 그건 좀 놀랍네요. “ 시미나의 대답에 훌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이 이야기했다.
” 나이 많은 게 놀라워? 다른 부분이 아니라?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보통은 ‘베스트셀러 작가’ 이런 부분에서 놀라는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돈 많이 벌었을 텐데 여기는 왜 다녀요? 이런 거 물어봐. 시미나씨는 진짜 반응이 일반적이지 않아서 좋다니까. “ 둘은 남의 연애 이야기의 결말을 뒤로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로 향했다.
” 그러면 상담센터 일이 취미 아닌가? “ 시미나의 놀림에 훌팩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 무슨 소리야, 글쓰기가 취미라서 자아실현을 글에서 하는 거야, 일이 되면 그건 괴롭지, 그리고 집에만 있으면 글이 더 안 나오고, 사실 상담센터가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있고 전화가 오는 곳이라 캐릭터 설정이 …. “
오랜만에 시미나는 다른 사람과 자신의 개인사를 이야기하며 상대방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지나간 시간은 그저 과거일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와 고통도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는 전혀 관련 없었다. 과거의 어느 순간에 머물러 있느라 시미나는 현실을 모르는 체하고 또 다른 소중한 인연이 될 수도 있을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과거의 그들도 각자의 욕망에 충실했고 시미나도 그랬었다. 그거면 된 거였다.
악연으로 끝난 인연도 그저 지나간 시간에 흘려보내고 이제는 시미나에게 소중한 사람들과 미래의 자신에게 집중할 때였다. 시미나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가치에 의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래서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면 할수록 불행해질 뿐이었다. 같은 환경에서 살아왔어도 경험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되는데 어떻게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는 돈일 수도, 권력일 수도, 인연일 수도 있었다. 모두 다를 뿐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미나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열심히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이었다.
시미나는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닐까라고 괴로워하던 과거의 자신을 이제 겨우 마주할 준비가 된 기분이 들었다. ‘ 너는 잘못 살지 않았다, 과거의 모든 괴로움은 네 잘못이 아니다. ’ 너무 깊은 곳에 숨겨두고 외면하느라 찾기도 어려운 마음의 응어리를 두드리면서 시미나는 자기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미나가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 욕망덩어리 커플의 소문은 이 큰 상담센터를 폭풍같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나프니아는 결국 자신의 모든 분노를 쏟아내고 그만두었으나 모런과 미리드는 자신들을 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잘만 살았다. 절대 사그라지지 않을 거 같던 소문은 새로운 장작이 공급되지 않자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무도 관심 없는 가십이 되어서 사라졌다. 간혹 모런과 미리드가 그 난리를 겪고도 동거를 시작했다는 등의 소문이 나기는 했지만 평이한 남의 연애사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세상은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만 했다. 시미나의 마음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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