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낯선 세상은 적어도 웹소설을 보다가 잠에서 깨어나거나, 환생 트럭에 치이거나 남들은 포기한 인기가 없어진 게임에서 진 엔딩을 봤다거나 하는 흔한 사건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달랐다. 사건이 일어날 아무런 전조증상도 없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고 평상시와 달랐던 것은 그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바로 집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오랜만에 한강공원으로 산책하러 간 것뿐이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한강변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끝나가는 여름의 열대야를 이기기 위해 야외에서 밤을 불사르고 있는 젊은이들로 군데군데 채워져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열기가 부담스럽고 혼자만의 자축이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나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드나들기 쉬운 나들목 근처의 휴식지대를 지나쳤다. 그리고 주차장 근처 편의점에 들러서 맥주 몇 캔과 스피또 2000 복권을 사서 산책하는 사람들도 거의 끊긴 공원 산책로에서도 계단을 여러 차례 내려가서 고립된 강변 앞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은 정말이지 운이 좋은 날이었다. 내 평생의 불운은 오늘을 맞이하기 위해 일어난 사소한 일이었다.. 이런 날에 복권과 맥주가 없는 하루를 마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보다 늦잠을 자서 아르바이트에 늦을뻔했지만, 신호가 거의 막히지 않아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으며, 알바에서 만나 몇 달 동안 썸만타던 그녀와 같이 퇴근하는 길에 손을 잡고 한 단계 관계가 진전되었으며 몇 년을 고생하며 준비한 회계사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이제야 겨우 한고비를 넘은 인생을 기뻐하며 축하받고 싶었지만, 오랜 수험생활로 파탄 난 인간관계로 인해 같이 축하해 줄 친구가 하나밖에 없었던 나는 신입 직장인으로의 힘든 시간을 보내는 친구의 평일 밤을 방해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혼자 자축하며 한강에서 맥주 몇 캔을 먹고 일어선 것이 다였다.
계절 막판에도 온 힘을 다해서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 올여름의 더위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조금 진정이 되어 시원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더위와 같이 존재감을 과시하며 난동을 부리고 얼굴에 들러붙는 날파리 떼들은 비가 오려는지 가로등 아래서 미친 듯한 존재감을 발휘하며 맴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짜증스러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손을 여러 번 흔들었음에도 하필이면 눈에 들어간 벌레로 인해 나는 눈을 몇 번 깜박이며 하늘을 쳐다본 것뿐이었다.
“젠장…….”
눈을 사포로 긁는 것처럼 통증이 일었다. 나는 한쪽 눈을 감싸며 날파리 떼들이 있는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에서 눈물이 솟구침에도 불구하고 비틀거리며 가로등 아래를 벗어났다.
오늘의 밤하늘은 조금이나마 밝아진 나의 미래를 밝혀 주듯이 환했었는데, 찹쌀떡을 상자에서 바로 꺼낸 듯한 약간 눌린 모양의 쫀득쫀득해 보이는 달이 떠 있어서 밤이 깊었음에도 매우 밝았다. 그렇다고 해도 쇼를 할 정도의 화려함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벌레의 습격이후 고통받던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은 조명축제 같은 불빛이었다.
“벌레 좀 들어갔다고 눈에 이상이 생긴 것도 아니고 술을 너무 마셨나?”
나는 몇 년 사이에 약해진 체력을 탓하며 근처 벤치에 앉아서 눈에 들어간 이물질을 빼내기 위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밤 열두 시를 넘어선 한강공원이 아무리 늦더위로 인해 잠을 이루기 힘들다고 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사람이 많아지고 불빛이 화려해질 수 있나?
초췌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멍하니 앉아서 시뻘게진 눈으로 한쪽에서만 눈물을 흘리는 기괴한 모습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 내 모습이었지만, 사람들이 눈을 마주치는 것을 거부하고 나를 슬금슬금 피해서 지나가는 것이 내 잘못인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갑자기 변한 주변 상황을 무슨 일인지 궁금해만 하고 있었다.
사람들만 많아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저 멀리 보이는 놀이공원의 대관람차와 롤러코스터 등 절대 지금 보일 수 없는 놀이기구가 눈에 보였지만 오랜만에 알코올에 절여진 뇌는 눈에 보이는 장면과 현실의 차이를 논리적으로 구별해 내는 것을 거부했다.
‘근처에 축제라도 있었나? 갑자기 뭔 사람들이 이 밤에 이렇게나 많이….’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놀이공원 퍼레이드를 준비하듯이 길을 막으며 차단막을 설치하던 사람들 주변으로 관광객들이 모여들었다. 그 때문에 놀이공원에서 많이 보이는 풍선을 잔뜩 매단 캐릭터 옷을 입은 사람이 인파에 밀려나서 내 쪽으로 이동해 왔고, 처음 보는 인형 탈을 입은 풍선 장수를 따라서 아이들도 같이 움직였다.
‘애들이랑은 잘 안 맞는데….’
나는 하루 종일 운이 좋았던 하루 때문에, 도파민에 절여있던 뇌로 인해 평소에도 애들 근처에 가면 늘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과 자정이 넘어버린 깊은 밤인 것을 잊어버린 채 괜찮겠지, 하는 안일함으로 이제 조금은 괜찮아진 눈가를 문지르며 옆으로 조금 슬쩍 비켜 앉았다.
생전 처음 보는 캐릭터들이 새겨진 풍선들은 그새 많이 팔려 나갔고, 더 많아진 인파들 사이사이로 멀리 보이는 곳에서는 실제로 퍼레이드가 시작된 것이 보였다.
‘아니 이게 무슨…. 이 밤에 퍼레이드를 한다고? 민원 폭발하겠는데….’라는 덜떨어진 생각을 하며 집 나간 정신을 찾아오기 위해 애썼다. 그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흘끔흘끔 쳐다보며 내 눈치를 보며 풍선을 사던 어린애가 내 앞에 섰다.
“아저씨, 오늘 아주 슬프고 아팠어요?”
어린애의 뜬금없는 물음에 당황할 새도 없이 그 애 뒤로 보이는 색색의 알록달록함에 놀라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X발. 미쳤나!”
나는 오늘이 오기까지 맹세하건대 애들한테 욕을 하거나 학대하거나 하는 사람들을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내가 애들이랑 안 맞는다고 생각한 것은 그저 그들의 정신 나간 체력과 끝을 모르는 명랑함과 이상하게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며 끊임없이 질문하는 끈질김에서 비롯된 피곤함이지 싫어해서 괴롭힐 대상은 명확히 아니었다.
무의식중에 욕을 내뱉었으면서도 내 눈을 믿지 못해 여러 번 다시 깜빡이며 사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을 비비고 있자니 내 욕설에 놀란 애가 손에 들고 있던 풍선을 놓치며 울음 터트렸다.
“아니, 난 그게 아니라….”
나는 아이를 달래야 한다는 생각으로 손을 뻗었지만, 진동모드라도 된 듯 덜덜 떨리는 손은 길을 잃고 더 나아가지 못했다.
“하…….”
아무리 여러 번 눈을 깜빡이며 비벼대도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여러 가지 알록달록한 색 광채로 둘러싸인 어린이였다.
나는 벌레가 들어간 눈이 고장이 났다고 생각했지만 당황스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바닥을 보며 한숨을 내쉬다 본 장면에 더 놀라 소리를 질렀다.
“으아 아악!”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번에는 정말이지 기절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의 몸을 둘러쌓고 있는 알록달록한 광채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말을 건 아이의 그림자는 검은색이 아니라 여러 색이 파도가 치듯이 출렁거리며 움직였는데 각각의 색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데이션 효과로 경계가 서로 오묘하게 섞여서 애가 우는 소리에 따라 같이 파동을 치며 움직였다.
나는 맥주를 마시다 공원에서 잠이 든 것이거나 너무 오랜만에 마신 술과 기쁨의 도파민에 중독된 뇌가 환상을 보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 되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멀리서 걸어오고 있던 덩치가 곰만한 남자가 아이를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남자는 내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며 위협했다.
“너 이 새끼 내 딸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남자들보다는 마른 편이긴 했다. 원래부터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이기도 했지만, 예민한 성격과 몇 년간 지속된 수험생활로 인해 그나마 있던 살도 많이 빠진 상태였고 공부와 알바를 병행하느라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하게 몇 년을 살아온 이유도 있었다. 나는 지난 몇 년간 개인 생활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 학원 알바 알바 집의 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마른 것과는 별개로 키는 180이 넘게 큰 편이라 성인 남자가 쉽게 멱살을 잡아서 들어 올릴 만한 체격은 아니었는데 곰 같은 남자는 물리법칙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눈이 고장이 났든 미쳤든 상관없을 정도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는 혼란한 정신을 극적으로 수습하고 빠르게 소리쳤다.
“전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나는 간절함을 목소리에 듬뿍 담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남자는 내 목을 거의 조를 듯이 들어 올려 흔들어 대다가 내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 바닥에 내려놓으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애가 왜 울어? 루리야 이 아저씨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제 아버지가 와서 마음이 놓였는지 금새 울음을 그친 꼬마 숙녀는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쁜 말 했어. 우기 오빠가 맨날 하는 말. 그래서 놀라서 풍선이 날아갔어.”
루리가 퍼레이드 행렬이 그들 앞을 지나갈 때 때마침 나의 죽음을 선고했다. 아랫집 중2병에 걸린 중딩이 맨날 하는 말이 입에 욕을 달고 사는 것임을 아는 루리의 아빠는 처음보다 배는 화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나의 생명을 위협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지금 이 사태를 해명하지 않으면 내가 미쳤는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오해입니다. 전 그냥 눈이 너무 아프고 따님이 말 걸었을 때 이상한 것들이 보여서 너무 놀라서 헛소리가 튀어나온 것뿐입니다.”
나의 횡설수설하지만, 간절하게 내뱉는 변명에 곰같이 나를 위협하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고민하더니 내려놓았다.
“아니 아프면 집에 있을 것이지 여기는 왜 나와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래요. 그쪽 때문에 우리 딸도 놀라고 풍선도 날아갔으니 멱살 잡은 건 서로 없던 일로 합시다. 분장인 줄 알고 오해했잖아요.”
남자의 말에 천천히 안정을 찾아가던 심장이 다시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피눈물이라니 이게 무슨 어이없는 말인가 싶으면서도 나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얼굴을 닦아내기 위해 손을 들었다가 퍼레이드의 강렬한 불빛으로 인해 보이기 시작한 피범벅이 된 손을 보고 다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자가출판 책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떠보니 다른세상-4 (2) | 2024.10.23 |
---|---|
눈떠보니 다른세상-3 (5) | 2024.10.22 |
말 안 통하는 상담소 16 (2) | 2024.07.20 |
말 안 통하는 상담소 15 (4) | 2024.07.04 |
말 안 통하는 상담소 14 (2) | 2024.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