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낮과는 다르게 인간의 시간이 아니었다. 밤에는 어둠에 가려져서 현실과 이면세계의 경계가 모두 밤의 장막에 가려져서 흐릿해졌기 때문에 밤이 되면 인간이 아닌 자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반사해서 스스로 빛나는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래서 보름이 되어 달의 시간이 강력해지면 이면 세계와 그 신비한 세계에 속해있는 자들의 힘이 강해졌다.
이 시간을 틈타 신비의 힘이 강해지면 흐릿해진 차원 결계와 뒤섞인 통로들로 인해 혹시라도 길을 잘못 들어 운 나쁘게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는 인간들이 나올 수 있으므로 보름날 밤에 인간은 현실과 신비 세계의 경계에 있는 수미산 여행사로의 방문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두 세계의 경계에 발 걸치고 있는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들어는 올 수 있어도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력 차단을 위한 진법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저……. 문이 고장 난 것 같은데 확인을 좀……."
나의 조심스러운 요청에 한쪽 옆으로 비켜서 있던 도대리가 냉큼 앞으로 나와 문을 열었고, 전혀 문제 없이 잘 열렸다.
문제는 내가 문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을 때 다시 발생했다. 분명히 열려있던 문은 그런 적이 없었다는 듯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있었고 이때쯤 되어서는 꿈과 알콜 탓을 하던 나도 슬슬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꿈이 이렇게까지 생생할 수 있나?’
문이 나를 거부하는 것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보름이 아닌 때에도 밤에 [수미산 여행사]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술력이 있어야 했는데 술력은 육체와 정신이 하나인 자들만 수련할 수 있었고, 육체와 영혼이 별개로 존재하는 인간은 가능성이라고 정의된 틈이 존재했기 때문에 영력은 쌓아도 술력은 쌓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 술력을 쌓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선기를 쌓아 신선이 되는 것이었는데 선기라는 것 자체가 탈인간화를 위해 자연과 동화되기 위한 수련을 하는 것이므로 신선들은 당연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오늘은 대보름날이었고 자정을 넘어 인간의 방문이 금지된 시간이었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 결계는 아무 흔적이 없었는데…….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결계를 파하고 흔적 없이 넘어왔다는 말이야……."
사장은 아까의 나처럼 혼이 반쯤 빠져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야차들에게 결계를 다시 샅샅이 확인하도록 했으니, 이유를 알아 올 겁니다. 조금 기다려 보시는 게……."
예 대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여행사 사무실이 아니라 정갈하고 우아해 보이는 집무실처럼 보이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혼이 나간 신과 인간 둘의 대치가 이어졌다.
혼란의 시간이 지나고 대화가 시작된 것은 예 대리가 조사 결과와 함께 돌아온 이후였다. 어떤 내용인지는 나는 알 수 없는 그들의 긴 대화가 오간 후 자신을 수미산 여행사의 천다문 사장이라고 정중하게 소개한 사장이 대화를 요청해 온 것이었다.
이쯤 되었을 때는 나도 이 상황에 대해 많이 의심스럽기 시작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달빛 어쩌고 차를 얻어 마신 다음에는 알코올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어느 때보다 명료해진 뇌가 괴이한 느낌을 회피해 도피하는 것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사용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듯한 출입문, 갑자기 이동한 다른 공간, 자각한 지 한참이나 되었는데 여전히 꿈에서 깨지 않는 상황까지……. 잠재적인 위협을 감지한 토끼처럼 나는 바짝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예전에 베프와 친누나의 연애 소식을 듣기 직전처럼 이 이야기를 들으면 내 세상이 뒤짚히게 될거라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지만,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까 한강공원에서 맥주 몇 캔을 먹고 걸어 나오다가 눈에 벌레가 들어갔다?”
“네 뭐 간단히 말하면 그렇죠? 그거 말고는 예 대리를 만나기 전까지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서우씨는 차원을 넘어왔다 그 말인가요?”
“네? 차원이요? 무슨……. 예 대리를 만났을 때는 제가 눈 상태가 안 좋아서 좀 이상한 게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멀쩡해졌습니다.”
도대체 저놈의 차원 코스프레는 언제 끝나는 건지 피곤함이 급격하게 몰려왔다.
“정확하게 어떤 것이 보였습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평상시와 다르게 보인 것이 있으면 모두 말 좀 해 주세요.”
천 사장의 이마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꿈틀거렸지만, 그는 나에게서 확인할 무언가가 있는 사람처럼 집요하게 물어댔다.
“한강이 좀 이상해 보이긴 했죠? 저 멀리서 놀이기구 같은 것도 보였는데, 한강에 놀이기구라니 상상력도 참 ……. 제일 이상한 건 예 대리 딸이었어요. 그 종이 인형 아시죠? 그것처럼 배경과 똑 떨어져 보이고 외곽선을 따라서 무지개색 빛이 보이더라고요. 그림자도…….”
그림자 이야기를 설명하자니 아까 느꼈던 이상한 기분이 다시 떠올랐다. 그 그림자는 화려한 색깔로 너울거렸지만 어쩐지 빨려 들어갈 것 같이 오싹한 기분이 들게 했다. 말하다 말고 생각에 잠겨있는 나를 응시하던 천 사장은 뭔가를 포기한 얼굴이었다.
“다과나 좀 먹으면서 생각하세요. 배가 고프면 머리가 더 안 돌아가니까요. 계수나무 달빛차도 더 마시는게 낫겠네요. 정신을 맑게 만들고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줍니다.
천사장은 뭔가를 대비하듯 달빛차 영업사원처럼 효능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지만, 젊은 사장으로 부터 늘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한다는 잔소리를 하는 엄마 생각이 나게 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오늘 밤 겪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피곤해 있던 정신이 살짝 느슨해지면서 풀어졌다.
‘그래, 뭐가 궁금한지 몰라도 얼른 대답해 주고 가면 돼지.’
참으로 안일한 생각이었다.
눈을 깜박이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세상은 선을 많이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이서우씨는 그림자를 통해서 이 세계로 넘어온 것 같습니.어떤 이유로 차원파편이 눈에 들어갔는지는 알수가 없지만... 한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시간여행 유전자가 없는 일반인은 차원파편을 보유하게 되더라도 차원이동은 불가능해서 세계의 틈새에 갇혀 차원미아가 되는데 운이 좋네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설명을 길게도 하는 사장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모든 개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린다고 하더라도 운이 좋다니!’
욕지거리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저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다 상관없으니 그만 집에 가고 싶습니다. 좋은 일이 있어서 집에서 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서요. 오늘 일이 좀 일찍끝나서 알바 끝나는 시간까지 안 들어가면 걱정하실 거라 그만 가봐도 될까요? 무슨 소리인지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무슨 헛소리를 이렇게 정성스럽게까지 하는거지? 이 회사는 도대체 뭘까 미친사람으로 몰아서 돈이라도 뜯으려고 하는거야 뭐야?'
머리속으로 온갖 생각이 다 스쳐지나가고 이러다가는 장기까지 털릴것같은 불안감에 천사장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달려나갔다.
그 방에 문은 분명 하나였는데 활짝 열린 문으로 보인것은 정말이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이런 씨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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