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그날이 지나간 지도 벌써 며칠이 흘렀다. 평범한 보통 사람인 나는 그동안 분노의 5단계를 착실히 겪고 있었다. 그 첫째는 부정의 단계였다.
내가 그때 여행사 사장실의 문을 열고 나온 뒤에 본 것은 험상궂은 인상의 새까만 얼굴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돌려 말해도 절대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인형처럼 표정 변화 없이 서서 새까만 옷을 입고 철판인지 가죽인지 알기 어려운 검은 갑옷 같은 것을 걸쳤는데, 전체가 다 까만 모습에 노란 눈만 형형하게 빛나는 상태라 지옥에 발 들인 기분이었다. 사극에만 나오는 칠흑 같은 어둠과 악마가 결합해 눈앞에 실체화가 된 듯했다. 누가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는 옷과 장식품들의 조화가 끝내줬다.
끝내주게 무서웠다는 소리다. 전형적인 패알못(패션에 대해 지식이 전혀없는 사람)이 선택한 옷차림이었다. 공포감 조성이 목적이었다고 하면…….
그래 그만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사실 그들의 겉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잠시, 눈알만 옆으로 굴려 나를 쳐다보던 눈과 마주친 이후에 기억이 사라졌고, 그 이후에 이 집 침대에서 깨어났다. 선 채로 기절했기 때문이었다.
‘젠장.’
그때만 생각하면 나는 수치심과 공포심에 침대 구석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악마처럼 보이던 그들은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증거처럼 보여서 무섭고 괴로웠다.
갑자기 지옥문을 열어젖힌 느낌이었기 때문에 되새기면 새길수록 정신이 피폐해졌다.
나는 감금당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충격적인 시간 이후 이 집에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집 밖으로 뛰쳐나간 뒤 온 도시를 헤매고 다녔고, 그 어디에도 우리 집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내가 초등학교 이후 거의 인생의 반 이상을 살아온 아파트단지는 복합문화 공간이라는 공연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주소지에 다른 건물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현실과 비슷했지만 미묘하게 뭔가가 달랐다. 과학기술이 있는 것은 맞는 데 영적인 뭔가가 같이 존재 했다. 분명히 버스나 택시 등의 운송수단이 있었는데 초능력 같은 걸 이용해서 날아도 다녔다.
더 많이 다른 점도 있겠지만 정신없는 와중에 눈에 확연히 보이는 것은 그 정도였다. 부적 같은 것을 사용해서 사고 난 차량을 없애는 것을 봤을 때는 나는 결국 이곳이 다른 세상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정이 지나고 온 것은 분노의 시간이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세뇌당했어! 정신 차려! 아니야!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말도 안 돼!’의 단계를 무한 반복한 뒤 설마 하는 생각에 혼잣말도 했다.
“상태창……? 파이어……? 힐……? …….”
시간이 좀 지나서 상태창이 나타난 소설도 있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읽었던 웹소설에 나오는 기억나는 단어들은 전부 무한 반복하며 중얼댔지만,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다.
“차원 이동이라며! 파편인지 뭐 있다며!! 그러면 나한테도 뭔가 능력을 줘야지!!! 하다못해 새 몸이라든가!!!! 뭔 아이템이나 기연이라도 줘야 할 거 아냐!!!!!”
점진적으로 고조해서 정신이상자처럼 폭발할 듯이 화를 냈다가 다시 포기해서 우울증 걸린 사람처럼 울다가 다시 단계별로 화를 내는 상태가 반복됐다.
혼자서 보기에도 아까울 정도였는데 이 상태가 거의 한 달가량 지속되자 눈 뜨고는 못 볼 지경인 상태를 직관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나는 현재 객식구로 남의 집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나를 구해준 예문적의 집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세계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남의 집에 침입한 도둑이나 마찬가지 상태였다. 무단 침입자가 발생한 것은 이 세계가 생겨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 조사를 끝마치기 전까지는 여행사에 머무르게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인 내가 현실과 이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받거나 끼칠지 아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 그나마 인간에 가장 가까운 예문적이 나를 떠맡게 된 상태였다.
예문적은 미래에서 건너온 시간 여행자였는데 뱀 영물로 그 본체는 백사였으며 천년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존재였다. 그는 시간의 파편을 모두 모아 이 시간에 거주를 허가받은 수호신 이었다. 시간 여행을 마친 존재들은 이전 육체가 어찌 되었든 이곳에서는 새로운 삶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과거는 그저 그의 기억에만 존재했다.
그는 이주한 이곳에서 시간 여행자의 파편을 가진 여성과 결혼해 정착했으며 태어난 딸이 예루리였다. 그 딸은 비록 잡신이지만 수호신이 된 아버지와 신의 유전자가 1/4 정도 섞인 어머니의 유전자를 받아서인지 겁이 없었다. 또한 어린 나이에도 이미 그 유전자가 발현이 된 상태였다.
그래서 어른들은 나의 미친 짓을 알면서도 이 세계의 적응과 정신상태에 대한 배려를 위해 나를 외면했지만, 그 애는 밥을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내 방 앞을 자주 서성거렸고 내 미친 짓을 실시간 라이브로 구경했다. 나타날 리가 없는 상태창을 실시간으로 계속 불러대다가 9살 어린 애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너무 놀라서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그건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쪽팔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야차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보다 정신적 충격이 더 심했던 것 같다. 예루리의 눈이 한심함을 가득 담아 철 안 든 어린 동생을 보듯이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을 때에서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실시간으로 흑역사를 적립하고 나서야 부정과 분노의 시기를 지나 겨우 타협의 시간에 진입했다. 그리고 닥친 현실에 대해 깨닫고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곳에서 집도 직장도 신분도 하다못해 갈아입을 옷도 없는 거지보다 못한 상태였다.
지금까지야 제정신이 아닌 내가 불쌍해 보이고 이상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예문적이 나를 보호해 주고 있었지만, 제정신을 차리고 나니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없음을 깨닫고 나자 차라리 마음이 차분해졌다.
*
거의 한 달 만에 방 밖을 나와서 예문적을 찾는 나를 보며 그의 아내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이는 금방 퇴근할 거예요. 이거 너비아니 버거인데 루리가 좋아해서 많이 만들었으니까 먹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며칠 만에 맛보는 정상적인 음식인 버거를 맛보며 일상적인 대화를 시도하며 뜬금없이 떨어진 세상에 대해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너비아니 버거는 햄버거 패티 대신 너비아니 구이를 빵 사이에 넣은 음식이었는데, 말만 들어도 맛있었으며 실제로는 유명 수제버거집 뺨칠 만큼 맛있었다.
식충이 마냥 초대받지도 않은 주제에 남의 집 음식을 축내고 있던 나는, 나에게 남은 몇 안 되는 물건 중 음식류를 꺼내 들며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성의라도 표시해서 감사 인사를 하고자 했다.
“저 이거 제가 여기 오기 전에 편의점에서 샀던 건데 괜찮으시면 좀 드시겠어요? 맥주와 버터구이 오징어 간단한 간식류도 있는데……. 별거 아니지만 드릴 게 이것밖에 없네요”
“맥주요? 버터구이 오징어? 편의점에서 그런 것도 파나요?”
예문적의 아내와 예루리는 내가 건네준 편의점 비닐봉지를 뒤져보며 깜짝 놀라서 물어봤다.
“엄마 나 이거 먹어도 돼?”
“안돼. 그거 술이야. 너 먹는 거 아니야.” 나는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그들은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맥주와 다른 간식들에 매우 큰 호기심을 드러냈다. 다른 세상의 음식에 거부감이 없고 즐거워 보여서 그나마 마음의 짐이 조금 줄어든 기분이었다.
때마침 돌아온 예문적이 합류했다.
대화 중에 깨달은 것은 겉으로 보이는 풍경은 현실 세계와 비슷했지만, 맥주 같은 서양식 음식은 거의 없고 한국의 전통음식 같은 음식이 현대식으로 발전된 느낌이었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흔히 마신다는 백일주는 한약재와 꽃향기가 어우러진 독특한 맛이었는데 한 모금만 마셔도 귀한 술인 것이 느껴지는 듯한 맛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술맛은 이곳이 압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마시기에도 한약재가 많이 들어가서 몸에 좋은 느낌이 들면서 끝맛이 달콤하니 술이지만 특별하고 상쾌한 맛이 느껴졌다. 또한, 예문적의 아내가 중간중간 만들어 낸 안주는 백일주와 잘 어울리고 내 입에도 꼭 맞아 입에 달라붙는 것 같이 맛있어서 타협의 단계에 들어온 나를 위로해 주며 자기 합리화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다.
그래, 어차피 적응해야 하는 상태니까 음식이라도 입에 맞으면 좋지.
예문적 가족이 나에게는 기연인가 보다. 이 세상에 떨어져서 예문적을 만나지 못했으면 지금쯤 노숙을 하면서 왜 내가 이런 이상한 세상에 떨어졌는지 짐작조차 못 했을 텐데.
그래 신이 아직 나를 버리지는 않았어.
실종 상태일 테니 자격증 붙은 것도 어떻게 구제될 수도 있어. 안되더라도 집에 갈 수만 있으면 괜찮아.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 그러니 그만 나를 괴롭히고 이 세상에서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보자.
나와 예문적은 둘 다 얼큰하게 취해서 대화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이 세계로 전이된 뒤 처음으로 마음의 안정을 조금 되찾았다. 나는 마음이 바뀌기 전에 천사장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했고 전쟁 같은 며칠간이 편하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예루리는 내가 가지고 온 편의점 팝콘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참을 집중해서 먹더니 우리의 대화가 길어지자 지루해하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서우 오빠 이 종이는 뭐예요?”
예루리가 오빠라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지만, 그 와중에도 흐뭇해져서 상냥하게 설명했다.
“그건 복권이라는 건데 여기 이 부분을 동전 같은 걸로 긁으면 그림이 나오는 거야.”
“그림이 나오면 뭐가 좋은 건데요?”
이 세계는 복권이라는 것이 따로 없는지 예문적의 가족은 복권에 강하게 흥미를 나타냈다.
“같은 그림이 몇 개 나오는지에 따라서 보상금을 줍니다. 확률적으로 몇천만 명 중의 한 명이 당첨금을 받습니다. 일종의 게임인데 행운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거의 이루어 질 수는 없지만 누군가는 그 행운을 잡기 때문에 소시민들의 희망인 거죠.”
복권이 꼭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처럼 허무하게 느껴져서 다시 괴로워졌지만 이제 마음을 좀 추스른 나는 그 씁쓸함을 속으로 삼키며 예루리에게 복권을 긁어볼 기회를 주었다.
“똑같은 그림이 많이 나오면 더 많은 행운을 가질 수 있어.”
내 말에 열정적으로 복권을 긁어대던 이루리는 내가 준 복권 두장 세트를 치켜들며 승리자처럼 소리쳤다.
“나 같은 그림 여러 개야! 이제 행운 많아!”
예루리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복권을 다시 받았다.
“보자, 꼬마 숙녀는 행운이 얼마…….”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고 겨우 분노의 시간을 빠져나와 타협의 단계로 들어서며 진정된 심장이 미친 듯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
'자가출판 책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떠보니 다른세상 -7 (2) | 2024.10.27 |
---|---|
눈떠보니 다른세상-6 (4) | 2024.10.26 |
눈떠보니 다른세상-4 (2) | 2024.10.23 |
눈떠보니 다른세상-3 (5) | 2024.10.22 |
눈떠보니 다른 세상-1 (7) | 2024.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