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었고 보름달에 가까운 약간 찌그러진 듯한 달도 분명히 확인했었다.
오늘따라 술술 들어가던 맥주가 상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깊은 밤이 분명할 이 시간에 여행사가 문을 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너무 기뻐서 정신이 나갔던 거야. 술 좀 깨면 별일 없이 공원에서 깨어나겠지. 여름이라 얼어 죽을 일도 없을 거고. 누가 좀 발견하고 빨리 좀 깨워줬으면 좋겠네. 자각몽은 내가 자각하면 금방 깨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댔다.
몇 캔 마시지도 않았던 맥주가 도로 넘어오는 것 같았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피곤해진 육체는 더 이상 논리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거부했다. 머릿속으로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마음이 좀 편해지며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건물들로 이루어져 아기자기해 보이는 1-2층 건물들로 이루어진 골목길 상가들은 자정이 넘은 시간임에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특이해 보이는 상점들도 많이 보여 궁금증을 자아냈지만 앞서가는 남자의 등이 급해 보여 내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오래되고 아름다운 골목길을 지나 남자가 도착한 곳은 의외로 골목을 빠져나가 도로의 거의 끝자락에 있는 최신식 빌딩 앞이었다.
[수미산 여행사] 최신 빌딩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고풍스러운 간판이 매우 반짝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여행사는 많아야 대여섯 명이 근무할 법할 정도의 작은 크기로 보였는데 이곳으로 나를 데려온 곰 같은 남자가 들어오자마자 일하던 직원들이 아는 체를 한 것으로 봐서는 그 사람이 일하는 곳인 것 같았다. 패닉에 빠진 사람을 지나쳐 가지 않은 선의는 고마웠으나 정신을 좀 차리고 보니 극한의 I인 나는 이 자리가 좀 불편해졌다.
남자는 한강공원에서 미친 듯이 혼잣말하며 중얼거리던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주변의 사람들이 줄어들고 내가 정신을 좀 차린 것처럼 보이자 뒤늦게 합류한 일행에게 아이를 맡기고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예 대리님 오늘 쉬는 날인데 왜 오셨어요?”
“사장님 계시지? 이 친구 좀 챙겨 줄래? 좀 다친 데다가 많이 놀라서 심신미약 상태인데 계수나무 꽃차 좀 부탁해도 될까? 아까 피도 좀 흘렸으니까 달빛수에 우린 거로 부탁할게. 나 사장님께 보고드릴 내용이 있어서.”
“여기 좀 앉아 있어요. 금방 나올 테니까.”
예 대리는 인사를 하는 직원에게 나를 맡기고 바람처럼 안쪽으로 사라진 뒤 한참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예대리라 불리는 곰 같은 남자의 부탁을 받은 직원은 불청객을 떠넘겨 받은 것이 기분이 나빴는지 나를 세워두고 구경거리처럼 이리저리 뜯어봤다.
“흠……. 그것참 이상하네…….”
혼자 중얼거리며 뱅뱅 돌고는 있었지만, 당하는 나로서는 매우 불쾌했다. 그래서였는지 꿈이라고 생각해서 뇌의 필터가 작동하지 않아서였는지 알 수 없으나 평소라면 대충 외면하며 자리에 앉았을 테지만 한마디 해줬다.
“사람 쳐다보면서 원숭이 구경하듯 쳐다보는 그쪽이 더 이상합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문 앞에서 손님을 배웅하고 오던 여자 직원이 놀란 눈으로 돌아봤다.
내가 아무리 내향형 인간이라고 해도 사람들에게 쉽게 당하고 있을법한 순한 인상은 아닌데 어떤 모습이길래 정말로 심신미약 상태로 생각하고 함부로 구는 것 같아 기분이 더 나빠졌다.
나는 눈은 큰 편이었지만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찢어진 편으로 턱이 좁고 날렵한 편이라 아무리 좋게 돌려서 이야기해도 순해 보이는 인상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거만해 보이고 냉기가 흐르는 인상이라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내가 나타나면 급격히 조용해지면서 불편해지는 외형을 가졌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타고난 인상을 무마시키고자 가능하면 웃으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었다.
입꼬리가 한쪽만 어설프게 올라가 어린애들 삥뜯는 고딩처럼 보인다는 소리를 듣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노력도 포기했고, 짧지 않은 수험생 시간을 보내며 살이 더 빠지고 햇빛을 거의 보지 못한 피부는 창백하게 질려 지금에 와서는 예민해 보이기까지 했다. 성격이 매우 나빠 보였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이들의 이런 놀란 듯한 반응이 나는 더 놀라웠다.
“초 주임이 보여요? 지금 밤인데? 뭐지? 분명히 사람인데?”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여자는 초 주임이라고 불리는 남자에 대해 내가 알아보는 기색을 보이자 거의 소스라치는 것 같았다.
“제가 사람이지 귀신이겠습니까. 눈에서 피 좀 흘렸다고 안 죽어요. 실명될 정도로 흘리지도 않았고요.”
내 대답을 들은 둘은 한참을 쑥덕대더니 이 상태였다.
예 대리가 부탁한 차가 내 자리 앞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관찰하듯이 앞자리에 앉아 뚫어져라 쳐다보는 둘을 보니 목이 말라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꿈인데도 이런 상태라니 내 소심한 성격에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도자희 대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차를 권유했다.
“한번 드셔보세요.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질 거예요. 귀한 달빛수를 사용해서 몸보신도 좀 될 거고요. 예 대리님이 좀 늦어지는 것 같으니까 마셔 두는 게 좋을 거예요.”
남의 영업장에 들어와서 한 자리를 차지한 불청객에게 귀한 차를 내주며 권유하는데 무시하기에는 나 같은 내향형 인간에게는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그래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얼음과 꽃잎 같은 것들이 같이 떠 있는 분홍빛으로도 보이고 연보라색으로도 보여 특이하고 귀해 보이는 색의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와, 이거 무슨 차라고 하셨죠? 오미자차 비슷해 보이는 색인데 엄청나게 시원하고 맛있네요!”
귀하다는 것이 접대용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는지 꽃향기를 한껏 풍기는 차는 마시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고 힘이 나게 했다. 좀 전까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그 매들을 풀기 어려울 것 같은 내 정신상태는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간 듯 맑아졌고 덩달아 몸에도 그때처럼 활력이 도는 것 같았다. 그 맛도 태어나서 배달 음식을 처음 먹은 것처럼 온 입안의 감각세포를 자극하는 듯한 끝내주는 맛이었다. 문학적 소양이 부족해 맛을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도 대리는 차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엄청나게 감탄하며 기뻐하는 나를 보면 피식했다.
“계수나무 차에 달빛수를 넣어 블랜딩 한 거예요. 특별한 손님이셨구나. 외유 중이면 말씀하시지, 존재감이 안 느껴져서 저희가 실례를 했네요. 한 잔 더 드릴까요?”
내가 특별한 차를 맛보고 기뻐하는 것을 본 도대리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재차 권유했고 이미 그 특별한 맛에 빠진 나는, 현실에서는 마실 수 없을 이 특별한 차를 사양하지 않고 여러 잔을 들이키고 있을 때였다.
곰 같은 존재감을 가진 예 대리가 들어간 문으로부터 진동이 발생하며 엄청난 소음이 들려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조그만 여행사가 부서질 듯 흔들리는 것 같은 어이없는 기운과 벼락같은 소리가 들려온 후에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내가 이렇게 상상력 넘치는 인간이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저 머리 꼬락서니는 도대체 뭐람.’
남자는 팔척(대략 270 센티) 장신이라는 말이 매우 잘 들어맞는 사람으로 한복처럼 생긴 옷을 입고 허리에 특이한 문양의 벨트를 하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꽃 모양으로 디자인된 황금처럼 빛나는 누런색 관을 쓰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영화나 만화 캐릭터 코스프레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여기는 여행사라 그 모습이 좀 웃겼다.
‘무섭게 생겨서 코스프레까지 할 정도의 덕후라니……. 이 회사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사장이라는 인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를 뒤 따라 나와 뒤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예 대리와 먹고살기 위해서 참고 있는 수많은 직장인이 새삼스럽게 안타까워졌다.
“무섭게 생기긴 누가 무섭게 생겨! 덕후는 무슨 뜻이냐? 기분 나쁘게 들리는데?”
“어……. 제가 입 밖으로 생각을 내뱉었나요? 죄송합니다. 그냥 머리 관이 진짜 금처럼 보이기도 하고 코스프레가 너무 신기해서…….”
내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소란스럽던 주변이 얼음물을 부은 것처럼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너 내 관이 보여? 내가 어떻게 보이는데?”
“어, 잘……. 키도 많이 크시고 엄청나게 패셔너블해 보이십니다. 검정색 한복 위에 화려한 벨트도 잘 어울리네요. 챔피언 벨트인가요? 어떤 캐릭터인지 몰라도 참 개성 넘칩니다. 하하하.”
내 말이 길어질수록 사장의 험악한 얼굴은 더욱 찌푸려졌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 인간인데, 어떻게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지? 분명히 차원 결계는 전혀 이상이 없는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화를 내던 사장은 자신의 헛소리에도 전혀 영향력 없는 해맑은 얼굴로 차를 홀짝이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눈치가 느껴진 나는 변명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제가 너무 오래 있었죠? 차가 너무 맛있어서 폐를 끼쳤네요. 예 대리님? 한테 감사 인사를 하고 간다는 게……. 하하하. 저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저 아까 이촌한강공원 근처에 있었는데 혹시 여기가 어디쯤일까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어디까지 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내가 주절거리면서 슬슬 출입문 쪽으로 이동하는데도 얼음처럼 서 있는 그들을 보면서 답을 듣기를 포기하고 문을 열었다.
“…….”
정확히는 문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젠장 할!”
성격 나빠 보이는 사장의 고함소리가 피곤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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