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지 해가 길어지고 있었다. 겨울에는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나 깜깜한 시간이라 나무에 새순이 돋았는지, 새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그야말로 자기 존재감을 마구 드러내는 산발한 머리와 화장기라고는 약에 쓸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맨얼굴, 노숙자로 오해받을 만큼 후줄근한 무릎 나온 추리닝 차림(운동복 따위의 고급스러운 단어로 절대 표현될 수 없다)이었지만 해가 길어지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이 시간을 맞이하고 나니 시미나는 더는 거지꼴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왜 상관해, 다시 볼 것도 아닌데 ‘라고, 당당하게 생각하면 좋겠지만, 시미나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에 예민했으며, 지구는 허브 행성으로의 역할을 매우 잘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 곳곳에 관광객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화사하다 못해 화려한 관광객들 사이를 거지꼴로 편안하게 다닐 수 있을 만한 무신경함도 없고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도 느껴야 하는 초라함을 참을 만큼 대범하지도 않은 시미나는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어라고 자기 합리화를 시전 하며 주섬주섬 멀쩡한 옷을 찾기 시작했다. '정말 싫다'라고 생각하면서 먼지 쌓인 화장대를 뒤적이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마음을 한순간에 바꾸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퇴근 이후, 남은 밤이 다 지나가도록 별로 생산성 없는 일 위주로 놀다가, 해가 뜨면 잠이 드는 생활을 지속했는데 오늘은 이유 없이 눈이 일찍 떠졌다. 햇빛 잘 드는 창가에 앉아서 따뜻 시원한 바람 냄새를 맡으며 앉아있는데 문득 갑자기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시미나는 오랜만에 차려입고, 평상시보다 일찍 집을 나서서 예전에는 출근 도장을 찍듯이 다니던 커피숍의 지점을 들러 다이어트를 이유로 눈길도 주지 않던 런던포그 밀크티를 호로록 대면서 출근했다. 우울증 걸린 무기력증 환자 주제에 다이어트는 왜 신경을 썼던 것일까? 갑자기 든 의문에 머릿속이 혼란해져 왔다. 물론 시미나 머릿속의 복잡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세상은 그대로였다.
시미나의 의문과는 무관하게 첫 상담부터 다사다난했다. 오늘의 고객님은 음악을 좋아하시는 것이 틀림없는지 끊임없는 도돌이표 질문을 반복했다.
" 솔라 공용은행에서 이쪽으로 전화해 보라고 했다니까! 정지된다고, 왜 못 해준다는 거야!!!"
" 네? 은행에서 여기로 전화해 보라고 했다고요? 고객님, 본인 계좌 정지를 요청하시는 거예요? 우리 은하 말고 타 은하에 있는 계좌요?
"아니라고 사기꾼! 내 돈 떼먹고 E190-AQ 은하단에서 지구로 도망친 놈 계좌! 스페이스 폴(우주 경찰) 이 지구로 도망친 거까지 확인해 줬어! 여기로 정지요청 하라고 했다고!"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머리 꼭대기에서 열이 도는 기분이었다. 우주 상담소는 같은 행성이 아니라 다른 행성에 있는 본인의 계좌에서 돈이 빠져서 나갈 수 없게 막아줄 수는 있지만 같은 은하계에 있는 타인의 계좌 정지는 불가능했다. 은행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데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뒷골이 땅기면서 짜증이 치밀어 왔지만, 이제는 이런 헛소리쯤은 가뿐하게 넘길 수 있게 된 자신이 뿌듯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 고객님, 우리 상담소에서는 진행할 수 없습니다. 경찰서 신고 부탁드립니다."
" 아니! 경찰이랑 솔라 은행에서 된다고 했다고!"
"고객님, 경찰서에서 되는지 확인을 해보라는 말인 거 같은데, 우주 상담소에서는 진행 안 되는 내용 이에요." 고객도 들을 생각이 없고, 시미나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둘 사이는 알력은 계속되었다. 경찰서까지는 계속 우길 수 없었던지, 이 고객 놈은 바로 말을 바꾸며 태세 전환에 들어갔다.
"솔라은행에서 된다고, 26920 상담소에 요청하라고 했다고! 다시금 인내심에 금이 가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지만 잘 참아낸 시미나는 대답했다.
"고객님, 정지되는 거였으면 솔라은행에서 진행이 되었을 텐데, 안되기 때문에 우주상담소에 문의하라고 한 것이 아닐까요?" 물론 이 고객이 은행에 전화해서 지금과 똑같이 자기 말만 했을 테니 그쪽에서 우리에게 떠넘긴 것이 분명했다. 이 고객 놈에게 더 이상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화를 받아줄 내가 걸렸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실랑이는 모두를 지치게 했지만 결국 승자는 시미나였다.
“우리 상담소에서는 진행이 불가능 하지만, 솔라은행에서 진행이 된다고 했으면 그쪽에 다시 문의해 보세요.” 결국 시미나는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남에게 떠넘기기를 시전 했다. 여러 차례 솔라에 전화하면 그럼 되느냐는 공방이 오간 뒤, 결국 고객 놈은 화가 났는지 통화 중 뚝 소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는 일진이 사납겠구나 하고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별일 없이 일반적인 문의들만 들어왔고 저 멀리에서 파트장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나름 평화로운 시간이 지나갔다.
"누구한테 보고하고 처리한 거야? 질문했어? 한참 파트장의 고함소리가 계속되었다.
“신입들 투입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안 물어보고 안내서 보고 나와 있는 대로 처리했는데, 하필이면 계좌 사고 신고였던 거지. 은하계 간 계좌 정지 요청이었던 건데 그게 오죽 복잡해. 메뉴얼대로 될 리가 없지.” 오늘 옆자리에 앉은 구디씨가 속닥였다.
구디씨는 비교적 지구에서 가까운 달 출신 결혼 이민자였는데, 성격이 좋고 인심이 어찌나 좋은지 근처에 앉을 때마다 먹을 것을 한 아름 챙겨 주었다. 그래서 시미나 씨도 구디 씨에게는 자연스럽게 친절해질 수밖에 없고 마음이 약해졌다. 구디는 먹을 것을 챙겨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대화를 이어갔다.
“신입인데 왜 안 물어보고 처리했대요?
”물어보면 이거 교육했는데 왜 모르냐고 난리 치니까 안내서대로 한 거지, 뭘 물어봐야 하는지 뭘 물어보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없잖아. 신입인데 뭘 알겠어. “ 구디씨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쪽을 흘깃대며 속삭였다.”
시미나는 바로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를 챘다. 아무나 드나드는 곳. 들어오기도 쉽고 나가기도 쉬운 상담소는 신입을 조금만 벗어나거나 조금만 일이 어려워지면 바로 그만두고 사라졌다. 경력이 쌓이더라도 신입과 월급 차이는 없으며, 잘하는 것만큼 더 일을 떠넘기려고 애를 쓰고, 대우를 해주지 않는데 전문인력 양성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이곳은 자본주의의 개념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곳이었다. 돈 받는 만큼만 일한다. 그래서 상담소는 늘 인력 부족에 시달렸고 전화가 몰리는 시간에는 관리자들이 신입 하나하나를 제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돈은 조금 주고 신입을 키울 시간은 없었으며, 사람은 부족한 상태,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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