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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떠보니 다른세상-9

당장 이라도 뭔가를 하지못해 조급증을 내던 이서우의 불안감도 이곳에 도착하면서 조금 가라앉았다. 산의 정상으로 올라올 수록 힘이 넘치고 정신이 맑아진 것은 기분 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조, 답답, 공포등의 모든 불안증은 정기가 가득한 설악산에서 머리속에 끼어있던 안개가 사라진듯 차분히 마음에서 정리가 되었다.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억울함이라던가 하는 심마의 찌꺼기가 사라지고 나니 이제는 허탈함과 탈력감 같은 기분이 다가왔다.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술법을 배울수 없단다."

바람에 눈처럼 날리는 꽃잎을 보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서우는 잠에서 깨어나듯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산신님, 오셨습니까?"

"그래, 생각의 찌꺼기를 털어내는 것은 좋지만 한 생각에 매몰되는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좋은일이지만 하나만 보고 주변을 보지 못하는것은 나쁜일이지. 그게 어떤것이든 생각의 균형을 이루는것이 중요하단다. 절대 나쁜것도 없고 영원히 좋은것도 없다. 생각이란 모두 마음 먹기에 달린것을 잊지 않도록 하거라."

"............ 네, 노력은 보겠습니다. 그런데 노력해도 안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생각은 제마음대로 다룰수 있는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죽어라고 노력했는데 그래도 마음의 균형이 잡히지 않으면요? 노력이라는게 늘 좋은 결과만 가져오는 건 아니지 않나요?"

"그래, 노력과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고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쁜 결과를 얻는다고 해서 얻는것이 없지는 않지. 성에 차지 않는 결과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알 수 있게 하거든. 한번의 시도에서 모두 다 성공 할수는 없단다. 그건 신도 할수 없는 일이야. 수많은 가능성이 각기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고 어떤 결과를 선택할지는 어떤 노력을 한것인지에 따라 결정된단다. 그러니 너도 포기하지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하거라. 상념에 빠질수록 원하는 결과는 멀어질 뿐이다."

"제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글쎄, 아무도 알 수 없는 답일거 같구나. 한가지는 명확하지, 길을 찾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것."

***
산신의 영역은 인간계와 선계를 잇는 그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곳이었다.

인간들이 대다수 거주하는 중간계는 연결된 차원들의 복잡함과 유기적인 움직임을 전혀 알 필요도 없고 알수도 없는 자들이 사는곳이다. 그들은 극소수의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 영안이 뜨여 이면세계를 볼수있었다.

산신의 영역은 환술계에 속해 있었는데, 중간계에 사는 대부분의 거주민인 인간들이 다른 차원의 존재들과 함부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막는 일종의 완충지대 였다.

환술계는 실제와 거짓의 영역이 명확히 구별되지 않아서 술력이 낮은 자들은 일정한 구역을 벗어나는 것을 어려워 했고, 환술 능력이 뛰어난 자들은 현실에 기반을 둔 환상을 진짜와 거짓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쉽게 섬세하게 구현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명계나 선계 중간계등의 타계에 속해 환술 능력이 없는 자들은 이곳에 질못 발을 디디면 길을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같은곳을 반복해서 돌다가 힘이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원래 왔던 곳으로 추방되었다.

옛날이야기 속에 안개 자욱한 산속에서 길을 잃고 밤새 헤메고 난뒤에 탈진해서 산 아래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모두 환술계에 잘못 발딛여서 생겨난 이야기라고 할수있다.

환술계는 그러한 이유로  태어나서 부터 술법을 익힐수 있고 환상에 홀리지 않을 강한 육체를 가진 영물들이 모여사는 곳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는데 최근의 이곳은 다른 세상처럼 복잡하고 정신이 없어졌다.

어린 영물들만  그나마 열정적으로 뛰어다니고 성인 영물들은 각자의 정신수련를 위해 조용히 참선 위주의 정신 수련을 했기 때문에 늘 조용하던 수련장은 주민들이 자취를 감춘듯 사라지고 시끄러운 고함 소리만 이어졌다.

"다시! 육체의  바탕을 만들기가 쉬운줄 알아! 100회추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를 외쳐대는 범상강을 참아오던 나는 일주일도 넘게 달리기만 지시하고, 자기 운동에 빠져있느라 러닝을 끝내면 다시 라는 말만 반복하는 그를 더 이상은 봐줄수가 없없다.

"앗, 산신님!"

내가 산신을 언급하자 마자 범상강은 수련장을 급하게 가로질러 와서 내옆에 섰다.

'아, 이 색기...... 역시 농땡이를....'

짐작이 사실로 드러나자 나는 머리가 더 차가워 졌다.

"아, 잘못봤네요. 어르신 오셨습니까?"

점심을 가지고 온 오소리 할아범에게 인사를 하자 바로 태세 전환이 이루어졌다.

"아, 할아버진인줄 알았잖아. 덕구 너는 왜 기척을 죽이고 다녀! 깜짝 놀라게!"

"도련님이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으셨나 봅니다."

오소리 할아범이 범상강의 말도 안되는 억지에도,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가져온 점심을 내려놓았다.

영물들은 육식을 즐겨할 것같은 외견과는 다르게 담백하고 가벼운 음식들을 주로 먹었다. 오늘의 음식도 역시나 심심해 보이는, 면이 굵은 국수 종류였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간장 볶음면을 닮은 모양새에 고기 고명대신 견과류로 보이는 가루들이 소담하게 쌓여있었고 고추를 닮은 모양의 야채들이 일정한 크기로 잘려 보기좋게 장식되어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매우 먹음직스럽게 보였으나 며칠간 이곳의 음식을 겪어왔던 나로서는 답답할 뿐이었다.

영물들은 정신 수련을 하느라 미각이 마비된것이 틀림이 없었다. 음식들은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는것과는 다르게 그 맛들이 순하고 가벼웠다. 21세기의 자극적인 조미료 맛에 익숙한 내 입맛에는...... 맛이 없었다. 누나가 다이어트 할때 먹는 곤약쌀로만 만든 밥을먹는 기분이었다.

밥 때문이라도 얼른 뭐라도 배워서 이 환술계를 떠나야 하는 내 초조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협조하지 않는 범상강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휴, 운동할때는 음식이라도 잘 먹어야 되는데......'

"아니 이걸 먹고 수련을 어떻게 해! 고기없어?"

영물들이 전부 미각이 마비되지는 않았는지 범상강이 청지기인 오소리 영감에게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동조의 고개를 끄덕이지 않기 위해 진중한 얼굴로 음식을 쳐다보기 위해 노력했다.

"산신님 께서 환술은 육체의 바탕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술법 수련이 가능하니 기초 환술부터 시작 하라고 하셨습니다. 구미호 반요가 회복되면 바로 같이 수련을 시작 할 수 있게요.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살생을 금하고 정기가 듬뿍든 음식을 먹는것이 좋다는 거 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 환술 기초도 기초지만 육체의 바탕을 만들어야 되는데 이거 먹고 어떻게 근육의 토대를 만들고 기의 순환을 연결해? 인간이 술법을 수련하는것도 말이 안되는데 음식도 이렇게 힘없는 애들만 내오다니! 쟤도 말을 못할뿐이지 힘들걸? 안그래? 이서우?"

그래, 그렇다고 하자. 지금까지 처럼 너 하고싶은거 다해. 나는 범상강을 만난 이래로 처음으로 그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더해라 더!

"............"

오소리는 싸가지를 밥말아 먹은 호랑이 영물 집안의 청지기(주인의 집안일을 도맡아서 처리하던 관리인 우두머리:집사)답게 흐린 미소를 지으면 가뿐하게 제압했다.

"제가 산신님께 한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

오소리영감은 영물답게 매우 현명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범상강의 우격다짐을 마주치자마자 한치의 고민도 없이 권력자를 들먹여 상대의 입을 막았다.

나는 원래부터도 반항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맛있게 먹는 척을 하며 이 자리의 권력자에게 범상강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며 빌붙기로 결심했다.

"어르신, 음식이 매우 정갈하고 아름답습니다. 상강님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음식맛을 잘 모르시나 봅니다. 혹시 직접 만드신 걸까요?"

차마 맛있다는 소리는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어리긴 누가 어려! 여기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데!"

오소리영감은 음식에 대한 내 칭찬에 매우 기뻐하면서도 오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영감이라고 부르시라니까요. 상강님의 말이 맞습니다. 살아온 세월만 따지면 여기서 상강님이 제일 나이가 많으시죠."

이 여러 세상의 다양한 종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나이는 상대적인 것으로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의 기준으로는 60세만 넘어도 어르신 소리를 들을수 있었지만 영물들의 세상에서 60은 젊은도 아닌 어린이 소리를 듣기도 어려운 나이였다. 하물며 오소리 영물과 호랑이 영물도 나이의 격차가 매우 큰 종 이었다.

호랑이 영물은 영물들 중에서도 우두머리인 산군의 지휘를 가지고 있었으며, 산군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술력을 가진 하나만이 산신의 반열에 오를수가 있었는데 일반 영물과 그 수명을 비교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깨달음을 얻은 산군이 산신의 경지에 오르면 그 이후의 세대 교체는 죽음이 아니라 원래의 산신이 세계의 법칙을 깨닫고 세상에 동화되어 법칙의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과는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영물들은 그들의 평균 수명에 따라 세상과 자신을 향한 생각의 깊이가 달랐는데 오소리 영물은 평균적으로 1000년을 살았다. 그러니 700살도 넘은 오소리 청지기는 영감 소리를 듣는데 아무 위화감이 없었다.

하지만 호랑이 영물은 그 10배도 넘는 시간을 살아가는 종족이었고, 이제 겨우 2천살이 넘은 범상강은 인간 기준으로 겨우 성인이 된 어린애였고, 정신연령도 딱 그 상태였다. 초금대와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상대적인 나이로 살아가는 그들의 세상에서 범상강의 행동은 무개념 그자체 였다.

오소리 영감의 이름을 부르며 함부로 대하는 것은 절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고, 이곳에 오기전에 천사장에게 영물들의 삶에 대해 간단한 교육을 들은 나도 알 수 있을 정도의 간단한 상식 이었다.

'그래, 이 새끼는 지가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래? 내가 들은 상식이랑 다르네? 영물들은 상대적 나이에 따라 서로를 존중한다고 들었는데 니가 그런 사리분별도 못하는 어린애인줄 모르고 괜히 나만 신경 써서 존중해주고 있었잖아. 잘됐다. 오늘 친구하면 되겠다. 잘부탁한다 범상강."

"............!!!!!!!!!!!!"

나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는 범상강의 뒤로 오소리 영감이 눈을 휘면서 웃는것을 분명히 보았고, 모른척 범상강과 눈을 마주치며 웃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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