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강과 기 싸움을 하고 오소리 영감에 대한 태도 지적을 한 것으로 한동안 피곤해질 걱정을 했지만, 생각보다는 별일이 없었다. 그날의 범상강은 멍하니 있다가 휘적휘적 사라지더니 다시 수련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만났을 때는 약간 풀이 죽은 모습이었지만, 처음의 어이없어하고 거부반응을 보이던 환술에 관한 교육도 멀쩡하게 시작되었다. 호랑이 족들 사이에서 오냐오냐 떠받들어져 살아왔던지라 아무도 그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한 적이 없어서 나의 지적에 다소 충격을 받은 모습처럼 보였지만 내 생각보다 범상강은 올바른 영물인 듯했다.
물론 체력 단련을 그만두는 일도 없었다. 몸을 만드는 것에 대한 범상강의 철학이 확고하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뭔가를 배워서 이곳에서 탈출한다는 내 목표에는 매우 잘 부합하는 상태라 그의 기분이나 몸 단련훈련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 이곳에 온 뒤에는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볍고 운동을 하면 할수록 달라지는 몸 상태가 느껴져서 체력단련을 하루라도 빼먹는 것이 뻐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육체를 만드는 과정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환술 교육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비과학적인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며,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 세상의 법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과학을 잘 못해서 문과 계열에 진학하는 바람에 미래가 죄송해진 사람이었다.
또한, 범상강에게 자연의 정기를 느끼는 것은 숨 쉬듯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우리는 환상적으로 합이 잘 맞지 않았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고, 그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기를 육체로 받아들이고 순환해야 한다니까! 숨 쉴 때 공기와는 다른 이질적인 기운만 돌려야 된다고.”
“… 그 이질적인 기운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니까. 뭔지도 모르는 걸 어떻게 돌려!”
“아니 이걸 어떻게 몰라. 무거운 기운이 안 느껴져?”
이질적인 기운이라니. 범상강은 헛소리도 매우 참신하게 잘했다. 그런 걸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면 모든 인간이 술력을 쌓았겠지.
나는 그가 답답해서 미치려고 하는 상태를 보며 인간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설명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모르는 것을 짐작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답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나마 우리 둘의 육체 단련은 잘 맞았기 때문에, 그가 대충 달리기 100번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보다 비약적으로 진도가 나갔다. 환술에 관련된 내용은 설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나는 육체라도 어떻게 단련해서 술법의 여러 종류 중 환술 말고 다른 것이라도 배울 수 있게 준비해야겠다는 악착같은 마음가짐이었고, 범상강은 자신은 어떻게든 진도를 나갔는데 아무 성취가 없게 되면 불호령이 떨어질까, 걱정이 컸기 때문에 질책을 피하고자 뭐라도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둘의 동상이몽은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는 시너지를 발휘해 순조롭게 잘못된 방향으로 순항 중이었다.
말로만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범상강 때문에 자격증 시험 통과 이후에 절대 공부는 다시 하지 않겠다고 한 결심이 무색하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밤을 새워가며 수험생처럼 술력에 관해 공부해야만 했다.
[천지의 기운이란 대체로 목화토금수 오행의 원리로 움직이는 것이며 기(氣)가 정(精)과 어우러져 순환을 통해……따라서 기의 순환을 ……그 축기를 통해 에너지의 순환이 이루어질 경우….]
씨X.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제발 누가 한국말로 설명 좀 해줬으면….
밤새워 공부했지만 전혀 쓸모없고, 몸은 점점 더 건강해져서 밤을 새우기 더욱 쉬워진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는 위기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 같던 시간도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훌쩍 지나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
초금대는 생각보다 몸이 많이 상한 데다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요괴라 적응을 위해 한동안 외부 출입이 금지되었었는데 그것이 벌써 한 달도 넘은 일이었다.
인간은 환술계에서 적응이 어렵고 술법을 익힐 수 있는 몸을 만들 수 없다는 걱정이 무색하게, 그사이 나는 술법을 익히기 위한 몸의 바탕을 다 만들었을 정도였다.
산신은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에 이룩한 결과에 매우 놀라워했지만, 내가 이 세계에 속해있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이해했다. 나는 내가 속해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는 동안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 하는데, 신과 비슷한 상태가 된 거라고 대충 이해했다.
절대 돌파구를 찾지 못할 것 같던 문제의 답은 다행히 초금대가 합류하게 되면서 그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정신과 기운을 연결해서 음 … 마음의 눈으로 심적 안정을 취하고 평상심을 눈으로 보내 …. 에이씨,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 원래 그냥 되는 건데!”
수업에 참여해서 범상강의 술법 강의를 참관하던 초금대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안 좋아졌다. 다행히 내가 인간이라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초금대는 쓴 커피를 통째로 속에 들이부은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했다.
“휴…. 상강님, 제가 한마디 보태도 되겠습니까?”
초금대와 나의 안 좋은 표정과 전혀 늘 기미라고는 보이지 않는 술법에 범상강도 자신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금 느꼈는지 바로 수긍했다.
“본래 인식하지 못하면 느낄 수도 없습니다. 눈을 감은 상태로 멀리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느리고 길게 호흡한다고 생각하고, 그 호흡을 통해 들어온 자연의 기가 몸을 한 바퀴 돌고 원하는 곳에 모인다고 상상해 보세요. 환술은 공간의 왜곡을 파악하고 그 실체를 꿰뚫는 영안을 뜨는 것이 먼저이니 모인 기를 눈으로 보낸다고 생각합니다. 준비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눈을 뜨면 됩니다. 그건 계속 호흡을 하다 보면 스스로 알 수 있을 겁니다.”
“나도 비슷하게 설명한 거 같은데 …….”
범상강의 헛소리가 들린 듯했지만 금세 사라지고, 한참을 초금대의 목소리를 따라 호흡하다 보니 눈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와, 이게 다 무슨….”
주변이 갑자기 환해지는 기분이 들어 눈을 떴을 때 나는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게 되었다.
분명히 벚꽃이 날리던 봄이었고 산과 암석, 나무들로 둘러싸인 넓은 수련장에 있었는데 오로라를 닮은 파란색 보라색 초록색 분홍색 등의 다채로운 색들이 섞인 빛의 장막처럼 보이는 빛 무리가 이리저리 움직였고 땅과 하늘의 구분이 없이 텅 빈 곳에 멀리서 아기자기해 보이는 알록달록한 집들이 빛의 움직임에 따라 파도를 타듯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어서 멍하니 눈을 껌벅여 댔지만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내가 나를 직접 볼 수 있었다면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분명히 봄이었는데….”
범상강은 한 달이 넘도록 변화가 없던 나의 영안이 초금대의 간단한 강의 이후에 바로 눈을 뜨자 당황하며 몇 번 웃더니 호탕한 척 칭찬하며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시도했다.
다만, 범상강이 나쁜 영물은 아니었지만, 눈치가 너무 없어서 역효과를 냈을 뿐.
“아무래도 반인반요이니 금대님의 설명이 큰 도움이 된 것 같네요. 대단합니다.
원래 이곳에 기분과는 정반대의 계절이 보이도록 환술이 걸려있어. 봄꽃이 날리는 풍경을 봤다면 쓸쓸한 기분을 느끼고 있나 보다. 하하하…….”
범상강은 입을 한번 열어서 둘의 기분을 한꺼번에 상하게 만드는 능력을 선보였다.
초금대는 자신이 반요 라는 사실을 싫어했고, 이서우는 자신이 우울하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알아차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저거 분명히 친구 없네. 입만 열면 손해 볼 이야기만 하는 거 보니까. 나는 모르는 척 외면할까도 생각했지만 이대로 계속 봐야 하는 둘을 생각하고 결국 말을 꺼냈다.
“그거 지금 칭찬이야?”
“…… 어……?”
내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는지 오소리 할아범 일로 경험이 쌓였는지 눈치 없는 와중에도 눈을 굴리며 입을 다물었다.
“영물들은 순혈을 더 높이 쳐 준다고 하던데 내가 오해했나 보네. 그리고 인간은 가끔 자기 기분을 남들이 몰랐으면 할 때가 있고.”
“……?! 아니야, 그런 거! 무슨…….”
“아니면 됐고.”
내가 흘낏 자신을 보고 새로 생긴 신기한 영안이라는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 자리를 뜨자, 굳은 얼굴로 서 있던 초금대가 동행했다.
“아니야! 진짜! 야, 나 진짜 순혈 그딴 거 생각도 해본 적 없어!”
범상강은 정말로 억울했는지 오늘 처음 보는 초금대의 앞에서 어른 인척 점잔을 빼던 것도 잊고 헐레벌떡 우리의 뒤를 쫓아오면서 소리쳤다.
“알았다고! 시끄러워 죽겠으니까 멀리서 따라와!”
“아니 나 진짜 그런거 아니야. 이서우, 초금대!”
그날은 내 영안이 뜨여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생겼고, 인간이 아니라 거리감이 느껴지던 영물들과 한걸음 가까워졌다.
***
새벽 00시
영물들도 인간들도 활동을 멈추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잠들었을 시간에 산신의 거처로 조용히 손님이 찾아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이서우가 술력을 닦기 위한 육체 수련을 끝마치고 영안을 떴다지요?”
산신에게 찾아온 손님은 북방의 결계를 지치는 다문천왕 천다문 사장이었다.
“생각보다 더 일찍 준비되었습니다. 원래는 환술만 가르칠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산신과 북방신의 사이로 한참을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서우가 허가 없이 이곳으로 넘어온 이유는 찾으셨습니까?”
“……. 결계를 넘어온 흔적은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이서우에게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 저 아이는 이 세계로 떨어진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영안에 눈떴고, 육체의 준비도 완료했습니다. 아무리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다고 하지만 인간이라면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요. 술법까지 익히게 된다면…….”
“이서우는 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넘어온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연결된 차원을 찾을 수가 없고요. 결국 술법을 익혀 스스로 시간의 흔적을 찾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서우가 속한 세계의 신이 왜 그를 이곳으로 보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돌아가고 싶다면 유일한 희망은 스스로 길을 찾는 것이지요. 어차피 이곳에서 살기 위해서라도 시간의 파편을 모아야 하니…….”
“……. 시간의 파편은 조금 위험하더라도 환술 정도만 익혀도 동료를 모아서 모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아이는 인간으로 집에 돌아가고자 하는 것일 텐데요…….”
“…….”
이서우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에 가득 찬 하루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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