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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떠보니 다른세상-13

바쁘고 분주한 하루였다.
 
갑자기 생긴 반려동물? 반려 정괴? 아무튼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새 친구로 인해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잡생각을 할 시간도 없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이름을 지어준 게 잘한 건가? 잘 안 알려진 비밀병기 같은 거로 생각했는데 도움이 되는 건 맞는 거겠지?'
 
정괴가 나에게 속하게 되어서 내 말을 듣는 것이 이득인지 아닌지 헷갈리기는 했지만, 새 친구는 계약하기 전부터 자기가 원하는 것은 대놓고 어필하는 똑똑한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반짝이라고 이름 짓고자 했던 나의 계획은 정괴의 거부로 실패로 돌아갔다. 잘못된 작명으로 인해 정괴도 화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짝이라는 말을 언급하자 정괴의 반짝이가 커졌다가 줄었다가를 반복하는데 공감 능력이 바닥을 기는 사람이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의 명확한 거부였다.
 
할 수 없이 나는 그 이름을 바로 포기했다. 나의 작명 능력이 별로라는 구박은 살면서 많이 들었기 때문에 반짝이의 거부 이후로 소심하게 여러 이름을 부르댔지만 모두 반려 당했다.
 
"정? 괴? 펄? 슬라임…?"
 
"......"
 
결국 던져본 이름은 모두 부르는 족족 거부당하고, 정괴의 이름은 실바로 정해졌다. 실바라는 이름은 정괴에서 바람 느낌이 난다는 신비한 여인의 조언에 따라 실바람에서 따왔는데 다행히 이 이름은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들여졌다.
 
'실바나 슬라임이나 차이가 뭐람. 우리 먹물이(우리 집 막내 반려묘: 검은색이다)는 내가 지어준 이름을 좋아만 하던데.'
 
'슬라'나 '라임' 이런 식으로 두 글자가 아니라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했지만, 입맛이 쓴 건 어쩔 수가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실바는 이름을 받고 나와 계약하게 되었지만, 이름을 받았다고 해서 엄청난 차이는 없었다. 조금 더 선명해 보이고, 존재감이 더 생기고, 말귀를 좀 더 잘 알아듣는 미세한 차이가 생겼다.
 
요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나오던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처럼 이름을 붙여주면 뭔가 극적으로 나와 정괴 사이에 끈끈한 어떤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상상했다.
 
그래, 나 머리에 꽃 들었다.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뀐 것은 계약 전에는 따라오지 마! 라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정괴가 알아듣고 잠시 멈춘다는 정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화장실에 못 들어오게 격하게 거부했더니 밖에서 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먹물이보다 나았다. 먹물이에게 거부는 통하지 않고 문 앞에서 계속 울어대는 통에 그냥 포기했었다.
 
인권 보호가 안 되는 것이, 집사의 삶이다. 정괴 집사의 삶은 달라야 할 텐데.
 
실바는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지만 내 상태는 좀 달라졌다. 실바와 대화라고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즐거워하는 듯한 기분 정도만 느낄 수 있던 상태에서 좋은지 나쁜지 슬픈지 지쳤는지 등의 모든 감정 상태가 계약 이후에 느껴졌다.
 
실바와 대화가 될 거라는 이야기는 이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말로 하는 대화는 아니지만 우리는 감정적으로 연결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실바와 계약한 이후로 이세계에 떨어진 뒤 처음으로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잤다. 계속 허공에 발 딛고 있다가 땅에 착륙한 느낌. 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 처음으로 생긴 정괴라는 이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든든했고, 실바와 함께하는 동안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내 마음을 위로해 준 덕이겠지.
 
‘정괴는 그렇다지만 갑자기 나타났다가 또 훌쩍 사라진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잠이 드는 중에도 다시 만날 일 없는 신비한 여자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도 여전했다.
 

***

 
사람은 뭔가를 단정 지어서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또 한 번 배운다.
 
실바와 계약 후에도 바뀐 것은 별로 없고 체력 단련할 때 같이 운동하는 동료가 한 명 더 생긴 상태였다.
 
범상강은 내가 실바에게 이름을 주고 계약하게 된 것에 조바심이 났는지 이것저것 새로운 훈련이나 소통을 시도해 보고 싶어 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 셋 다, 정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맛있는 간식을 눈앞에 두고 체중조절을 위해 간 안 된 닭가슴살을 먹는 기분으로 억지로 결계와 부적술에 관한 공부를 지속했다. 갑자기 안 하던 공부를 하고 혼자서 끙끙대며 이론 교육은 대충 초금대에게 맡겨두고 혼자서 부지런히 뭔가를 하던 범상강이 고민이 결론이 났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왔다.
 
"정괴에 대해 알려줄 강사를 초대했다는 말이야?"
 
"그래, 내가 어렵게 불렀어. 얼마 전에 결계 확인 때문에 선계에 다녀와서 피곤하다는데 너를 위해 억지를 좀 부렸지. 형님에게 감사해라!"
 
누구에게 부탁했는지 알 수 없지만 거절을 입에 담았다고 하면 상대방도 곤란했을 텐데 이 철부지 도련님은 상대의 사정은 가뿐히 무시했나 보다.
 
"거절했다면 곤란하다는 이야기잖아. 그냥 우리끼리 알아보자. 네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상대가 몇이나 된다고."
 
"별거 아니야. 무리한 부탁도 아니고. 그냥 핏줄한테 부탁했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써먹어."
 
범상강의 말에, 이번에는 초금대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상강님 핏줄이면 관악산 산군님을 불렀다는 말입니까?"
 
"어, 뭐 그렇지."
 
"관악산 산군? 산신님과 비슷한 건가?"
 
"......"
 
"어… 금대가 관악산 출신인가? 그럼 넌 좀 불편하려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산군은 산의 주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산신이 영원히 볼일 없는 하느님 같은 존재라면 산군은 그 지역 출신 권속들에게는 왕과 같은 존재였다. 왕국을 다스리는 그 땅의 주인 그것이 산군이었다.
 
초금대로서는 왕을 오라 가라 해서 맡긴 강의를 듣게 된 것이었다.
 
"걔가 좀 깐깐해서 그렇지 잘 가르쳐. 보이는 거랑은 다르다니까."
 
'아, 이 답 없는 금수저 새끼. 잘 가르치는 게 문제일까 지금.'
 
뭐 초금대의 상황이 안타깝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 음… 힘내라!”
 
“…….”
 

***

 
초금대의 안타까움에 좀 더 열정적으로 공감해 줄걸 그랬다.
 
나는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범상강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실바에 대해 알려줄 강사를 지켜봤다. 초금대도 나처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초조함으로 보였다.
 
쉽게 설명하자면 초금대는, 대기업에 취업했는데 입사 동기가 갑자기 일이 어렵다고 편하게 일을 가르쳐줄 사람을 불렀는데 나타난 사람이 회사 사장님인 초조함이라면, 나의 긴장은 첫사랑이자 짝사랑인 여자를 몰래 지켜보다가 침을 흘리는 모습을 들킨 뒤 자괴감에 빠져 도망친 뒤 그 여자가 친구의 호적메이트인 것을 알게 된 긴장감이었다.
 
뭐가 됐든 겪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범상강의 누이는 저번에 실바와의 계약을 도와준 그 신비로운 여성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여자가 몇 명 되지도 않는데 하필이면 범상강의 누이이자 산군이라니.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그… 그래, 그렇게 까지 추잡스럽지는 않았어.
 
'기억 못 할지도 몰라.'
 
나는 이번에는 입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인사해. 내 동생. 편하게 백로라고 부르면 돼. 할아버지가 좀 오래 자리를 비우실 거 같아서 할아버지 대신해서 처리할 것들이 있어서 한동안 환계에 머무를 거 같다. 겸사겸사 실바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당분간 고어 교육과 뭐 이것저것도 알려주기로 했어."
 
'이 미친놈아. 산신 대행에, 산군에, 강사님을 어떻게 편하게 불러!'
 
나와 초금대의 내적 자아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오랜만에 만난 누이와 보내는 시간이 범상강은 즐거워 보였다.
 
그나마 나에게는 이 고통을 함께 나눌 동료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산군님. 흑 구미호족 초금대라고 합니다. 관악산에 터를 두고 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바짝 얼어서 군인처럼 이야기하는 초금대를 보니 내 상황은 정말이지 별거 아니라 마음이 급속도로 편해졌다.
 
"아, 이오의 조카 구나. 너 요력 각성하고 얼마 안 지났을 때 집에서 한번 봤는데 기억 안 나니? 이오도 이번에 같이 왔어. 밖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이따가 만나보렴. 오랜만에 보겠다고 기뻐하던데."
 
산군의 말에 바짝 얼어있던 초금대는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 이모가 왔다고요? 선계 파견 때문에 가서 몇백 년은 안 올 거라고…."
 
"아 그거? 그건 해결돼서 이번에 같이 복귀했지. 수호대 복귀도 했고. 당분간 같이 환계에 있을 테니 잘 됐다. 네가 있는 줄은 몰랐네."
 
해맑게 웃으면서 알려주는 사실에 초금대는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산군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초금대의 이모는 엄마의 언니로 산군의 친위대인 수호대 소속의 무장이었다. 초금대는 집안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인간이 되겠다고 결심했지만, 그건 그의 이모인 초이오가 없을 때 이야기였다.
 
초이오는 요력을 각성한 이후의 초금대의 유일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초이오가 인간계에 있는 이상 제 마음대로 살기는 글러 먹었다. 또한 성인이 된 초금대를 아직 어린애 취급해 그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범상강만 눈치가 없는 줄 알았더니 그 동생도 똑같구나. 초금대가 싫어하는 게 안 보이는 건가? 아니면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서 세포가 다 죽은 건가?'
 
둘의 대화를 지켜보며 쳐다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집중하면 나타나는 겹쳐 보이는 형상은 초금대는 여전히 여우의 형상이 보였지만 범백로는 여전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여자로 보였다.
 
현실의 범백로는 피부가 하얗기는 했지만, 검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여성이었다. 산군은 호랑이족인데 범상강과는 다르게 왜 사람 형태만 보일까? 궁금함도 그렇지만 산군의 형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홀린 듯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절대 그녀가 미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이번에도 홀린 듯 쳐다보고 있자니 파편이 들어간 오른쪽 눈이 불타오르는 것 같이 또 아파져서 눈을 감았다 떠야 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보인 산군의 파란 눈에 놀라움이 보였다.
 
"너, 인제 보니 영안뿐만 아니라 심안을 각성했구나.“
 
아니, 그건 또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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