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나의 작은 소망은 배운것을 제대로 소화하기 전에 더는 모르는 뭔가가 튀어나오지 않는것.
나는 살면서 엄청나게 뭔가를 열심히 하면서 살아온 적도 없고 그렇다고 반항적으로 세상의 규칙을 위반하면서 살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있는 듯 없는 듯 튀지않게 적당히 별 불만없이 대충대충 살았다.
나쁘지 않은 머리는 투자대비 효율이 나쁘지 않았었고, 화목한 가정에서 고생이라고는 거의 해보지 않고 자란터라 뭔가를 이룩하겠다는 욕망도 별로 없었고, 무의식 한편에서는 평생을 이렇게 살겠지라고 생각했다.
좌절의 순간은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부터서였다.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난 사회는 정말이지 차가웠다. 일하는 하나하나마다 꼬투리를 잡고, 전부 다 상사인 놈들은 각자 다른말을 했다. 누구는 이렇게 하라 또 다른 누구는 저렇게 하라 전방위로 날아오는 피드백을 가장한 트집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작아지게 만들었다.
피드백이나 제대로 주고 뭐라고 할것이지 씨X.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분노조절 장애 환자가 된다. 첫 직장이니 그래도 조금더 버텨야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버틴게 억울하니 퇴직금 받을때 까지는 참아볼까, 요새 취업도 어려운데 뛰쳐나간다고 별로 달라지지 않을텐데 하는 수많은 생각들로 나를 죽여가고 있다가 결국은 입사 8개월만에 회사를 뛰쳐나왔다.
다행이 그때 이후로 나는 한층 커서 어른이 되었고, 오기가 생겼으며 처음으로 살면서 독하게 공부해서 자격증시험에 합격했다.
사실 인간은 잘 바뀌는 존재가 아니라 한동안 잉여인간으로 알바나 하면서 대충살았지만 대학때 부터 cc였던 여자친구가 정신을 번쩍들게했다.
그애는 내가 첫 직장을 때려치고 나온것을 이해를 하지 못했다. 만날때마다 직장생활의 힘듬을 토로하고, 그만두고 나와서는 알바로 연명하고, 재취업에도 열정적이지 않았던 - 이렇게 객관적으로 설명하다보니 답없는 인간처럼 보이는데, 아니다 그렇지 않다 - 나에게 백수가 된지 일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별을 통보했다.
그때 들었던 말은
1. 절실하지도 않고 : 사실 집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좀 편하게 살긴 했다.
2. 인내심도 없고: 이건 좀 억울하다. 그때 회사놈들은 다 정신병자들 같았다고!
3. 열심히 살지도 않는다 : 이건 전 여친이 너무 열심히 사는 인간이라 회사 다니면서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레전드라 그렇다.
사실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은 없었고, 자격증 시험도 여자친구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엑스는 시험 합격후에 얼마 지나지 않고 나를 차버리고 딴 놈과 결혼했다. 나쁜X.
그때 이후로 나는 예쁘고 똑똑한 여자들에게 컴플렉스가 생겼다. 그런 여자들은 자기 주관이 명확하고 삶에 대한 계획이 확실하며 반박하기 힘들게 논리적이었다.
꼭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우리누나 같았다. 그래서 예쁜데다가 말도 잘하는 여자들이 내앞에서 조곤조곤 뭔가를 설명하거나 물어보면 혼나는 것도 아닌데 혼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뭘 봤지? 눈이 아프기 전에 분명히 뭔가 봤을텐데?"
산군은 내가 자기 오빠와 친구 먹은 이계에서 넘어온 인간인 것을 알게되자 마자 말을 놓았고, 그래서 나는 그녀가 더 무서워졌다.
산군의 기에 눌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대답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제 오빠인 범상강과는 전혀 다르게 온몸에서 기백 느껴졌다. 처음에 봤을때 못 알아본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뭘 딱히 본것은 없습니다. "
지금 여기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새하얀 여자의 모습에 넋을놓고 쳐다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시 집중해서 잘 봐. 심안을 사용했을때 네 오른쪽 눈이 보라색으로 타올랐다. 분명히 뭔가 봤을꺼야."
산군은 궁금한 것을 못 참는 성격인지 바로 앞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내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대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비현실적인 외모의 여자가 가까이에서 얼굴을 만져대면 당황해서라도 떨리기 마련인데, 나는 등에 거의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내가 살면서 무슨 큰 죄를 그렇게 졌다고 이런 이런 시련을 주는건지.
산군이 가까워 질때마다 떨리는 것은 맞았지만 설레는 것이 아닌 진짜 무서움 이었다. 그건 감당할 수 없는 강함을 눈앞에 둔 듯한 기분으로 포식자의 앞에 떨어진 토끼같은 기분이었다. 한없이 미미하고 하찮은 존재가 된 느낌.
초금대도 나와 똑같은 것을 느끼는것인지 산군이 나에게 한 걸음 다가올때마다 그는 두 걸음 멀어졌다.
붙잡혀 있지 않아서 자유롭게 멀어지는 초금대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할수 있는 한 몸을 뒤로 빼며 눈알을 옆으로 굴리고 있는데 알수 없는 힘이 나를 옭아매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직접 음성이 울리며 몸이 굳어왔다.
[나를 봐라. 무었을 봤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주친 산군의 눈 안으로 특이한 문양같은것이 보이고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 나도 모르는 나와 마주친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하... 하얀 여자. 눈... 문양....헉!"
"야, 그만해. 얘 기절하겠다. 왜 언령에 속박주문까지 쓰고 난리야! 에이씨, 소름돋게!"
범상강의 말리는 소리에 그제서야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왔지만 산군은 여전히 말간 눈으로 나와 눈이 마주치고 있었다.
그녀는 듣기좋은 음성으로 다시 물었고, 주술이 깨졌음에도 나는 눈을 피할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대답했다.
"산군님이 색깔이 모두 빠진듯한 새하얀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걸보고있으면, 제 의지가 븐명히 아닌데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너무 아름답지만 제가 보고싶지는 않은데... 아니, 그런게 아니라.... 다른 자들은 짐승의 탈을 썼는데, 산군님은 다르고..."
정신이 살짝 나간 상태라 거의 횡설수설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내자 가만히 듣고 있던 산군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물었다.
"또?"
"지금 눈 동자 안에서 문양 보였는데 황금색으로 떠올랐습니다."
"흠, 나와 상강이 어떻게 달리 보여? 편하게 이야기 해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산군은 양심이 없나? 이 와중에 어떻게 편하게 이야기를 하지?'
이 집안 영물들은 눈치가 없고 양심이 없는 듯 했기 때문에 나는 포기하고 바로 현시점 최고 권력자에게 붙었다.
"산군님만 보이는것과 겹쳐보이는 현상이 모두 같습니다. 지금 모습도 아름다우시지만 겹쳐보이는 형상은 탈 영물 상태의 신비로움 그 자체로 색깔이 없어진 흑백사진으로 박제된 것 같이 우아해보인다고 말씀드릴수 있죠. 반면에 범상강은... 그냥 호랑이로 보입니다."
내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산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입을 털어대는 것을 보던 범상강은 어이가 없는지 눈을 부라리며 기가막힌다는 표정이었고, 초금대는 방 구석 끝에 거의 붙은 상태로 벌린입을 다물지 못했다.
칭찬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는 것을 모르는 애송이들이었다.
둘의 놀람은 가뿐히 무시하고 초조하게 산군을 지켜보고 있자니, 다행이 나의 전략이 통했는지 산군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을 했다.
"심안을 각성한건 확실해, 네가 현상 그 너머를 보려고 시도 할때마다 눈 안의 결계진이 활성화 됐어. 보통 각성한지 얼마 안돼서 제대로 다룰수 없는 심안은 위협을 받았을때 강제로 활성화가 잘 되는 편이지. 흰색도 붉은색도 아닌 보라색 심안이라.... 이건 한동안 지켜보고 시험을 해봐야 될거 같네. 아무튼 축하하네! 이제 술력을 쌓는건 전혀 문제 없겠어. 여행 준비를 해야겠군."
산군은 설명을 했지만 나는 알듯 모를듯 한 상태였다. 뭔가를 듣기는 계속 들어서 존재는 알지만 이야기속에만 존재하는 것. 유니콘이네. 글자로만 존재하는.
내 눈에서 영혼이 빠져나간걸 보고 있기라도 듯 선채로 기절하기전에 산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지... 그리고...."
원하는 대답을 다 들었는지 미련없이 떠나려던 산군이 잠시 망설더니 입을 달싹거렸다.
"가능하면 심안으로 나를 보는것은 삼가는게 좋겠군."
산군이 사라지자 얼이 빠져있던 두 얼간이와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해진 내가 남았다.
"심안으로 나를 보지마? 뭐? 아름답고 신비로워? 빨려들어갈 거 같애? 이것들이 쌍으로 미쳤나? 너는 그렇다 치고 쟤는 왜저래? 그럴 애가 아닌데 저런 하급 아부에 반응을 다 하고."
범상강은 매우 찜찜한 표정으로 나를 다그쳤다.
"심안이 뭔지 설명이나 해주고 말좀 해줄래? 영안과 차이가 뭐길래? 뭔 놈의 눈이 끊이지 않고 나와! 미션 하나 클리어 할때마다 진화하냐? 상태창 없어? 이정도 되면 상태창 줘야지!
내 분노의 외침에 미친놈을 쳐다보듯이 보던 범상강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나도 심안은 잘 몰라. 말그대로 마음의 눈 인데, 영물들 한테도 흔한 능력은 아니지. 우리도 각성이 필요한 능력이란 말이지. 영안은 말 그대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만 각성하는건데, 술법을 수련하기 위해서 가져야 되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인간들은 강제로 배워야 한다는 차이랄까? 난 인간이 영혼의 눈을 각성하면 영안이고 영물이나 신선 요괴가 새로운 눈을 뜨면 심안인줄 알았더니, 너 보니 아닌가 보다."
자신의 설명을 듣고 널부려진 상태에서도 생각에 잠겨있는 나를 보고 범상강은 우물쭈물 물었다.
"근데, 너 설마 진짜 백로한테 반한건 아니지?"
뭐래 이 미친놈이! 그렇게 이세계에서의 짝사랑은 시작도 전에 끝이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초금대는 정신이 살짝 나간 표정으로 나를 거의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봤다.
"정말 대단합니다. 산군님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다니. 전 상상도 못했는데. 근처에만 오셨는데도 오금이 저릴 지경 이었는데 아름답다고 칭찬을 건네다니. "
내가 어딜봐서 멀쩡해 보인다는 것인지 판단력이 마비된 초금대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범상강보다 더 찜찜함을 느껴야 했다. 둘은 보지 못했겠지만 산군은 입모양으로 분명히 내게 말했다.
[심안은 강력한 힘에 끌리기 때문에 홀리지 않으려면 오래쳐다보지 않는것이 좋다. 그리고, 이면의 보이는 형태는 상강에게 비밀로 해주렴.]
범상강에게 비밀로 하라니. 도대체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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